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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9일 정호영 목사님 설교말씀
In 주일 설교
Sung Jea In
2020년 11월 30일
[설교의 한글 번역문]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이사야64:1-9 오늘은 강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강림절은 성탄절 직전 주일부터 거꾸로 네 주일 동안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째 오심을 기억하며, 또 다시 오실 예수님 기다리며,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을 보내시는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큰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오늘 묵상 말씀은 이사야 64장 입니다. 이 본문은 유다 백성들이 탄식 가운데서 드린 기도문입니다. 기도자는 먼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조상들이 경험했던 그 엄청난 일들을 기억하면서 기도자는 마음이 갑갑해집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와 별로 다를 바 없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일을 행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70여 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절망적 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후인 10절과 11절을 보면, 기도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그들의 마음은 많이 설레었을 것입니다. 거대한 제국 바벨론이 신흥제국 페르시아에게 멸망 당한 것도,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모든 포로 민족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으로 돌아온 감격도 잠깐, 그들은 비참한 현실을 대면해야 했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보수했지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생각하면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기도자는 과거 출애굽 시대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 분의 강한 손을 펼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철야기도도 해 보고, 금식기도도 해 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아무런 말씀도, 아무런 행동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63장1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요즈음, 이 기도자처럼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낙심하며 씨름하는 분들이 우리 중에 적지 않습니다. 전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미국의 상황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침묵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Covid 팬대믹과 홍수처럼 넘치는 실업자들과 사업체들의 파산, 정치적인 혼돈, 사회 부정의, 그리고 그 외의 정신적 심리적 상태도 만만치 만은 않습니다. 포기할 것 다 포기하고 몸뚱이 하나만 남았는데, 그 하나도 추스르기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정금처럼 만들어 내시려는 고난이라고 여기고 견뎠지만,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치료되지 않는 질병을 붙들고 씨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 보아도 의사가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절망적입니다. 어떤 분은 마음의 병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우울증을 겪는 분들과 상담하다 보면 내담자의 우울증의 늪에 같이 빠질 것 같은 위협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깊고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로 인해 지옥 같은 나날을 살면서 시커멓게 멍든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며 고통을 받을 때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만난 기도자 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역사를 기억합니다. 성경말씀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셔서 문제가 해결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누구도 부인 못 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왜 누구에게는 기적적으로 개입하시고, 나에게는 침묵하시는가?’라는 의문입니다. 혹시나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더 열심히 기도해 보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점점 마음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을 믿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마음을 공격합니다. 더 심해지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라고 결론까지 짓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의 여정은 마라톤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경기를 끝까지 마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준비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바로 언제나 분명한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머지않아 큰 위기를 당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은 나의 착한 행동에 대해 항상 보상해 주시고 나의 악한 행동에 대해 틀림없이 징벌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곧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은 경험은 결코 놀라운 것도 아니며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만이 겪는 문제가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깊은 믿음의 경지에 있던 분들도 겪었던 문제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편지가 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 보면, 테레사 수녀도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을 여러번 보냈습니다. 그 유명한C. S. 루이스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병으로 잃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잔인한 침묵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 생활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일인가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몇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언어(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영’은 ‘공기’, ‘바람’, ‘숨’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뜻은 “하나님은 손으로 만지거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존재인 우리에게 있어서 공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듯,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 같은 영적 무감각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영적으로 맑아지고 깊어지며 예민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항상 활짝 깨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날씨가 흐렸다 맑았다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성도 그렇게 예민해지고 둔감해지기를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 중에 활동하실 때 영적인 방식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방식’이라는 말은 ‘비 물리적인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보편화 하기 어렵지만, 아버지들은 주로 물리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호통치고 강요하고 때로는 때렸습니다. 반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대개 영적인 방법 즉 비 물리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사랑하고 기회를 주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보듬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영적인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철없는 자식에게 어머니는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 자식은 물리적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눈치만 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자식에게 철이 들면 무력해 보였던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식의 잘못을 보고도 자주 침묵하시지만, 그것은 그가 깨닫고 돌아설 기회를 주려는 뜻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고 사랑의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철없는 우리에게 자주 침묵하시는 것 같고 무심한 것 같으며 또한 무력해 보이기도 합니다. 셋째, 침묵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벽을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의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본문에 이어지는65장 1절-2절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 때문에 얼굴을 감추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언제라도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 온 우주의 우주를 합한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 지구가 너무 커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커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때로는 너무도 느려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유다 백성은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북한의 지하 교인들에게 지난 70년은 너무도 긴 세월입니다. 지금의 미국 상황이 많은 분들에게 너무도 긴 터널처럼 느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일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알았기에 모세는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시 90:4)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증거도 아니요, 그분이 우리 삶에 무관심하다는 뜻도 아니며, 우리 삶에 개입하기에 무력하다는 뜻은 더 더욱 아닙니다. 때로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둔감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때로 죄책감에 짓눌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의 침묵을 느낀다고 해도 이상해 하거나 놀라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아무 소리가 없는 것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는 것이 없을 때조차 그분을 믿고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에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예상하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늘 설렘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희망을 가집니다. 기다림이 사라지면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강림절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강림절은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다립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유롭게, 넉넉하게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전심으로 감당하면서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이 있기에 희망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여전히 소망을 갖고, 기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우리의 이웃들과 나누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신실 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이 소식이 저와 여러분 마음 속 깊이 새겨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이 소식이 희망 없는 이 세상에 여러분과 저를 통해 널리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정호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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